인간에게 2대 본능이 있다면 ‘먹는 것’과 ‘섹스’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가 항시 마그마처럼 인간의 무의식 속에 담겨져 싸우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식사를 제 2의 섹스라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다.
‘먹는다’는 것의 언어적 뉘앙스도 그렇겠지만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들의 본능적 욕구인 것이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근본적인 욕구는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먹고 사는 일과 굶주림, 사랑, 그리고 성이다’라고
말한 해브릭 엘리스의 말처럼 성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란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이 본능에만 치우치다 보면 생활의 리듬이 깨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지혜가 생겨났고 풍속과 같은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200만년 전 인간이 이 지구상에 존재한 이후 시대와 사회에 따라 그 성의 형태가 다양하게 변천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세계 각처에서 드러나는 동굴 벽화를 보더라도 수십여 명의 남녀들이 집단으로 동굴에서 살았던 근거가 나왔고 남녀
모두가 사냥에 참여하고 또한 먹이를 찾아 이곳저곳을 이동하며 살았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물론 이런 유목적인 생활에서 성 역시도 혼재였다는 학자들도 있다.
그 당시의 성은 종족 번식의 비중이 컷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만큼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종족의 수가 많아야 하는데 번식을 위한 모든 노력이 동원됐으리라 본다.
요즘이야 쪽수가 많은 것도 중요하지만 돈이나 전략 등 다른 무엇으로도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기 때문에 성을 번식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쾌락의 한 방법으로 치우쳐져 있는 셈이다.
과거엔 오직 종족을 늘리는 방법뿐이었기에 일단은 많은 종족을 만드는 게 힘이었던 시대였다.
한 여성에게 특정 남편이나 아이의 아버지가 필요한 게 아니라 씨앗을 받아 잉태하면서 아이를 만드는 게 더 주요했으
리란 판단이다.
원시시대엔 아직 성적 자아로서 자기 삶의 질을 높이겠다는 문화적 의식이 성립되지 않았던 시기일 것이다.
여자는 어두운 동굴에서 주로 후배위로 공략하면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학자들도 있다.
그래서 우리 언어 습성에 남아있는 말이 ‘우리 아버지’, ‘우리엄마’, ‘우리 집’ 등으로 통칭 된다고 말한다.
사람이 성행위에 유별난 형태를 보이는 것은 왜일까?
인간은 새끼를 양육하는 기간이 다른 동물보다 길고 따라서 생존율도 높다.
이런 번식 방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암컷이 새끼를 낳은 다음에도 오랫동안 양육에 매달려 있어야 하며 이 기간 동안
암컷과 새끼들은 수컷에게 생존을 의탁해야만 했다. 따라서 다른 동물보다 더 강력하고 헌신적이며 장기간 지속되는
가족 제도가 필요하다.
이때부터 여자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에 정착하게 되고 남자들은 이들을 먹이기 위해 사냥을 해야 했고 또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지켜야 한다는 역할 배분이 되면서 한 가족 사이에서도 유목과 정착의 조화가 필요하게 됐다.
종족의 안전한 삶을 위해서는 남녀 사이에 강력한 정신적, 육체적 유대관계를 발전시켜야만 했다.
이런 목적을 위해 인간은 몸 전체를 섹스의 화신으로 발전시켜 왔다는 것이다.
심지어 데스먼드 모리스는 <털 없는 원숭이> 저서에서 전천후 섹스를 즐기는 동물답게 사람의 겉모습에서부터 대단히 섹스를 밝히는 종이라는 인상을 풍긴다고 말한다.
털을 벗어 던지고 벌거숭이 피부로 변한 것, 암컷의 입술과 젖꼭지와 성기의 색깔이 분명하게 변한 것, 암컷의 유방이
필요이상으로 둥글게 생긴 것, 둥글고 두툼한 엉덩이, 그리고 코가 필요 이상으로 오뚝하고 긴 것(이것은 남자 성기의
상징) 등 사람은 겉모습으로만 보아도 대단히 유별난 원숭이라는 것이다.
매일 섹스를 즐기는 암컷의 몸 전체가 수컷을 유혹하기 위한 상징으로 덮여 있는 것 같은 특징으로 인해 사람은 영장류 가운데서도 특히 유별난 종이 됐다고 갈파한다.
여기서 ‘섹스’와 ‘먹는 것’은 가족의 힘이자 생존의 방식이라는 말을 끌어 낼 수 있겠다.
아니 전 인류의 생존 방식은 ‘먹는 것’과의 싸움이며 종족 번식의 바로미터인 ‘섹스’ 그리고 여가적인 삶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섹스’와의 쟁탈전으로 크게 봐도 무방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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